프롤로그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영화사? 동창회? 아니면 복숭아뼈?
시간 순서대로 하자면 영화사부터 해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사에서 처음 제안했었던 섹슈얼리티 코미디 콘셉트는 한 달을 고민하다 접었으니, 동창회부터 시작하겠다.
대학로에서 중학교 동창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던 석구, 영재, 상민이를 만났다.
모두 오랜만에 만남이었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공 변소’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등장했고, 우리 반에 교생으로 왔었던 김유리 선생이 소환되었다.
나는 석구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새어 나오자마자 왠지 가슴부터 울렁거렸다.
주체하지 못하는 설렘을 느낄 때의 울렁거림 같기도 하고, 무엇인가를 두려워할 때 느껴지는 울렁거림 같기도 한,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경험했었던 그 이상하고 기묘한 울렁거림이 다시 찾아왔다.
그 날 이후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뭐 그리 대단할 것 하나 없는 중학교 2학년 때의 유치하고 낯 뜨거운, 다시 생각하기조차 민망한 이야기였지만, 마지막까지 그 가슴 속 울렁거림만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완성한 ‘몽정기’ 영화에서는 시나리오 원작에 담겨있었던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변주해서 94분 러닝타임을 맞췄다.
그래서 제작비도 줄였고, 하루에 한 회라도 더 상영할 수 있었다.
그 덕분인지 영화는 이 주 동안 박스오피스 1위를 하며 흥행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 시절의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 오롯이 담아보고 싶다.
그 시절의 재현이, 성에 대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채 호기심만 가득했었던 무지몽매한 시기를 경험한 남자들에게는 일말의 추억으로 다가가겠지만, 여성 독자들에는 불편할 수 있는 날 것의 대사와 시추에이션일 수 있기에, 그 시기의 가감 없는 사실의 재현에 앞서 프롤로그에서 미리 양해를 구한다.
어쩌면 무지하고 몽매한 채, 호기심만 가득했었던 그 시기를 지나온 남자들의 유치찬란함과 그 민망한 민낯을, 아마도 주변에서 이미 보았을 것이다.
여기에 그보다 더 숨김없는 ‘몽정기’를 과거로부터 소환한다.






제 1 화
황홀한 사춘기
1988년 4월
온 나라가 ‘88서울올림픽’ 준비로 들떠있었던 중학교 2학년 시절, 나의 꿈속엔 진한 장미꽃 향기와 함께 나를 감싸 안고 사라지는 여인이 자주 등장하곤 했었다.
나는 내 첫사랑이 되어버린 그녀를 들장미 소녀라 불렀지만, 꿈속에서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저 그녀에게서 풍기는 진한 장미꽃 향기와 내게서 멀어질 때 보았던, 가느다란 발목 아래 잘 익은 복숭아처럼 봉긋한 복사뼈를 기억해내는 것이 행복의 전부였다.
그렇게 그녀를 꿈속에서 만난 날 아침에는 어김없이 ‘몽정’이 찾아왔다.
그 시절, 나는 첫사랑과의 플라토닉 사랑을 꿈꾸었고 그녀를 실제로 만나면 반드시 순수한 사랑을 하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그런 나에게 ‘몽정’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몸이 제 마음대로 벌이는 짜릿함, 두려움, 그리고 수치심과 죄책감이 뒤섞인 기묘한 생물학적 배설이었고, 의성어로 변주된 내 별명이었다.
“어이~ 아침마다 찍찍!”
매일 등굣길을 함께하는 같은 반 친구, 석구가 나를 부르는 소리다.
“동현아. 너 오늘도 했냐?”
“응.”
석구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몽정을 한 적이 없기에 그 느낌을 궁금해 했고, 부러워했다.
“좋았겠다. 난 언제쯤 할 수 있을까……”
김칫국물 자국이 선명한 꼬질꼬질한 체육복 차림의 석구가 나를 동경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딘가 모자란 듯 늘 엉뚱한 소리를 하는 석구였지만, 의리 하나 만은 탁월한 나와 둘도 없는 단짝이었다.
“너 어제 몇 번 했는데?”
“세 번.”
“그걸 하루에 세 번씩이나 하는데 몽정할 게 남아있겠냐?”
“넌 아직도 안 하냐?”
“난 그런 거 안 한다.”
실제로 나는 그때까지 자위를 하지 않았다.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기는 했었지만, 자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마치 범죄자가 범행을 계획하는 것 같은 불온함을 느꼈다.
열다섯 살의 나는, 그 불온함을 애써 밀어내고 있었다.
“내 주위에 딸딸이 안치는 애는 너뿐일걸.”
“내 주위에 하루에 세 번씩 하는 애도 너뿐이다.”
그때였다.
그때 석구한테 그 책을 받지만 않았어도 나는 내 몸의 순결을 지킬 수 있었다.
아니, 지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과연 그랬을까?)
석구가 가방에서 빨간색 표지에 ‘황홀한 사춘기’라고 새겨진 책을 꺼냈다.
“알지? 황홀한 사춘기. 이 시대가 나은 최고의 빨간 책. 난 이걸로 어제 세 번 했다.”
석구의 손에는 그 시절, 모든 이가 갈망했었던 빨간책 ‘황홀한 사춘기’가 들려있었다.
“어제 우리 고물상에 들어온 건데 이걸 보고도 안 하면 넌 정말로 정상 아닌 거다. 자, 내가 너를 위해서 특별히 챙겨왔다. 컬러판으로.”
“……난 그런 저질스러운 책은 관심 없다.”
관심 있었다!
석구를 기절시키고 난 후, ‘황홀한 사춘기’만 빼앗아 무인도로 달아나 혼자 읽고 싶을 만큼 간절하게 보고 싶었다!
“보기 싫으면 말고. 이 책하고 마이마이카세트하고 바꾸자는 애도 있으니까. 아, 컬러판이면 변진섭 테이프도 준다더라.”
“알았어. 일단, 네 성의를 봐서 보긴 볼게. 하지만 아무리 야해도 그 건 안 할 거야.”
나는 석구에게 건네받은 ‘황홀한 사춘기’를 가방 깊숙이 집어넣었다.
‘황홀한 사춘기’의 시대가 있었다.
1988년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었고, 이제는 추억 속으로 사라진 ‘비디오 플레이어’ 조차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은 ‘황홀한 사춘기’ 부류의 에로 서적이나 ‘선데이 서울’ 같은 잡지를 통해서 성적인 호기심을 채웠고, 그런 종류의 콘텐츠를 가진 아이들이 어깨에 힘을 줄 수 있는 시대였다.
돌이켜 보면, 요즘 ‘야동’이 대학교 수위의 내용을 담고 있다면 그 시절 우리가 보았던 내용과 수위는 초등학교 수준이지만 그때는 그 수준의 사진이나 성적인 문구만으로도 화덕에 담금질한 쇳덩이처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물론 그때도 일부 아이들은 세운상가 등에서 서양 사람들의 은밀한 사진이 담긴, 일명 ‘섹스 책’이나 미국 잡지, ‘플레이보이’, 야한 내용과 그림이 담긴 일본 망가(만화)를 사는 이들도 있었고, 1989년 들어서는 ‘비디오 플레이어’가 널리 보급돼서 포르노 테이프가 유행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내 인생 처음으로 가장 큰 충격과 황홀함을 보여줬던 건, 누가 뭐래도 석구가 준 ‘황홀한 사춘기’ 였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치는 가운데,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으로 한 장 한 장 넘기던 ‘황홀한 사춘기’의 표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녀의 비밀은 최초의 경험에서 시작되며 애욕의 수렁과 뜨거운 육체를 감당키 어려워 가쁜 숨결과 욕정의 분출로 이어지는 한 여인의 황홀한 체험기!! (출처-나무위키)’
“동현아. 꿈속에 그 여자 또 나왔냐? 들장미 소녀?”
“응.”
“봤냐?”
“뭘?”
“그 여자 누드.”
“아니. 아직 얼굴도 못 봤는데……”
“그럼 그 여잔지 어떻게 알아?”
“복숭아뼈.”
“복숭아뼈?”
“복숭아뼈 보면 바로 알 수 있어.”
“옷은 하나도 안 벗고?”
“내가 얘기했었지? 난 플라토닉 사랑을 할 거라고. 그러니까 꿈속에 나오는 들장미 소녀도 굳이 벗고 나올 이유가 없지.”
“그럼 여자 복숭아뼈만 보고 아침마다 싸는 거야?”
“……응.”
석구가 왠지 나를 존경 어린 눈빛으로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넌 정말 특별한 재능을 가졌구나.”
“내가?”
“부럽다.”
“뭐가?”
“복숭아뼈는 양말만 벗으면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거잖아.”
“그런데?”
“그럼 굳이 여자 누드를 보려고 애쓸 필요 없잖아. 복숭아뼈만 보고도 싸는 능력을 가졌으니까.”
석구의 엉뚱한 소리는 대부분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에 늘 딱히 반박할 수 없는 묘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건 그렇지……”
복숭아뼈만 보고도 싸는 것이 ‘능력’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던 나에게 석구의 칭찬은 왠지 같은 남자로서 우쭐한 기분마저 들게 했다.
“근데 상민이는 보지 않았을까? 여자 누드. 걔 부모님이 여인숙 하잖아.”
그때 상민이가 자전거를 끌고 다가왔다.
그 시절 유행했었던 스노우 진과 청재킷 차림에 무스를 발라넘긴 세련된 헤어스타일의 소유자, 상민이는 우리 중에서 가장 멋쟁이였고, 시쳇말로 ‘쿨한’ 성격의 같은 반 친구였다.
“상민아. 너 혹시 너희 여인숙에서 여자 누드 직접 본 적 없냐?”
석구가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없는데.”
상민의 간단한 대답에 석구의 얼굴에는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물어본 건 아니었지만, 실망감의 크기는 석구와 다름없었던 건 왜일까……
“영재가 보이스카우트 선배한테 야한 일본 망가 빌렸다던데, 거기에 다 나와 있지 않을까?”
석구와 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상민에게 되물었다.
“영재한테?”
“응.”
인생을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수많은 지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소멸되는 경우가 많은데, 성에 관한 내용만큼은 오래된 도서관 서가에 늘 꽂혀 있는 ‘세계명작소설’처럼 여전히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다.
성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비밀’이었던 시대, 특히 청소년은 성에 대해서 일자무식한 것이 미덕이었던 시절, 내 머릿속 음지에 이제 막 도서관 하나가 개관하였고 황홀한 사춘기, 선데이 서울, 플레이보이, 일본 망가(만화) 등등이 서가를 채워가기 시작했었다.
나는 그렇게 내 ‘음지 도서관’ 서가를 처음 채웠던 성에 관한 남루한 지식을 지금까지도 무수히 대출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